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평생 동안 방대한 양의 디지털 흔적을 남기게 된다. SNS 계정, 이메일, 클라우드 문서, 온라인 사진, 동영상, 암호화폐, 웹사이트, 유튜브 채널 등은 이제 단순한 데이터가 아닌 하나의 자산이자 기록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망했을 때 이 디지털 자산이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법적,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디지털 유산의 개념 자체가 아직 법률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회색지대에 놓여 있다. 이에 따라 상속 대상이 되는지 여부, 계정 접근 권한, 프라이버시 보호, 플랫폼의 책임 등이 불분명하며 유족과 사업자 간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 디지털 유산이 법적으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를 4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한국 민법상 디지털 자산의 상속 가능성
현재 한국 민법에는 ‘디지털 유산’이라는 용어 자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민법 제1005조에 따르면 사망한 사람의 재산은 상속의 대상이 되며, 여기에는 유체재산뿐 아니라 무형의 권리도 포함될 수 있다고 해석된다. 이 조항을 바탕으로 일부 법률 전문가들은 디지털 자산 역시 상속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망자가 보유한 암호화폐, 유료 디지털 콘텐츠(영화, 음원, 전자책 등), 도메인 권리, 온라인 쇼핑몰 계정, 블로그 수익 계정 등은 금전적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상 상속 자산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디지털 자산에는 법적 해석이 복잡한 특수성이 있다. 대부분의 디지털 자산은 '사용권(License)' 형태로 부여되며, 이는 사망과 함께 종료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넷플릭스 계정이나 카카오계정, 유료 게임 계정 등은 실질적으로는 개인에게만 부여된 사용권일 뿐, 제3자에게 양도하거나 상속할 수 없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즉, 디지털 자산의 일부는 민법상 상속 가능한 자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계약 구조에 따라 상속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도 존재한다. 이는 플랫폼의 약관, 이용 규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보통신망법과 개인정보 보호의 충돌
디지털 유산을 상속하거나 정리하려는 유족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법률적 장벽은 바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과 ‘개인정보 보호법’이다.
이 두 법률은 사망자의 계정에 타인이 접근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법은 사망자의 개인정보도 보호 대상에 포함된다는 해석이 유력하며, 이 경우 유족조차도 고인의 명확한 동의 없이 개인정보가 담긴 계정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구글이나 네이버, 카카오 계정에 접근하려고 해도, 사업자는 유족에게 정보를 넘기기보다는 ‘개인정보 보호’를 우선시해 접근 요청을 거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는 상속인임을 증명해도 이용 약관상 명시된 “타인에게 계정 정보를 공유하거나 양도할 수 없다”는 조항이 발목을 잡는다.
즉, 디지털 유산은 민법상 상속 대상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망법 및 개인정보보호법의 적용을 받을 경우 실질적인 계정 접근이 법적으로 차단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러한 충돌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유산을 공식적으로 다루기 어렵게 만드는 대표적인 법적 딜레마다.
사망자 계정 처리에 대한 국내 플랫폼 정책의 모호성
국내 주요 IT 플랫폼—네이버, 카카오, 다음, 토스 등—은 사망자의 계정 처리에 대해 내부 지침을 운영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지침은 법적 근거보다는 내부 약관이나 회사 방침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네이버는 유족이 사망자의 계정에 대한 접근을 요청할 경우, 기본적으로는 제공하지 않으며, 단지 계정 삭제 요청만 가능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카카오는 사망자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나 메일 정보에 대해서는 절대로 제공하지 않는 방침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계정 내 데이터가 제3자에게 제공될 경우, 향후 법적 분쟁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 입장에서는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쪽이 더 안전한 선택이 된다.
더욱 문제는 이 같은 플랫폼별 정책이 법률적으로 통일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명문화되어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유족은 각 회사의 고객센터에 개별적으로 요청을 해야 하며, 거절당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해외 플랫폼인 구글, 페이스북, 애플은 일정 부분 디지털 유산 처리 절차를 제공하고 있지만, 국내 플랫폼은 여전히 사망자 계정 처리에 대한 명확한 절차, 책임 기준, 정보 제공 범위에 대한 기준이 부족한 상황이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입법 및 판례 현황
현재 한국에서는 디지털 유산과 관련된 명확한 전담 입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국회에서 디지털 자산의 상속과 관리에 관한 법안이 일부 발의되기는 했다.
2022년에는 ‘디지털 자산 상속 관련 민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되었고, 개인정보 보호법 개정안에 사망자의 정보 활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심의 단계에 머물거나 폐기된 상태다.
법원의 판례도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디지털 유산과 관련된 판결은 몇 건 있었지만, 대다수가 ‘사망자의 계정은 원칙적으로 유족이 관리할 수 없다’는 보수적인 해석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서울중앙지방법원의 2021년 판례에 따르면, 고인의 SNS 계정에 대한 접근 권한은 유족이 보장받을 수 없고, 계정의 내용은 해당 플랫폼의 정책에 따라 처리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판례, 입법, 제도, 해석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사망자의 권리와 유족의 권리 사이의 균형점을 어떻게 잡을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미비한 상태다.
결론: 디지털 유산의 법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향성
디지털 유산은 더 이상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면서, 처리되지 않은 디지털 자산과 계정이 온라인상에 남겨지고 있다. 한국은 디지털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이와 관련된 법적 체계는 한참 뒤처져 있는 실정이다.
디지털 유산을 민법상 상속 자산으로 분류할 수 있도록 명확한 법적 정의를 내리고, 정보통신망법 및 개인정보 보호법과의 충돌을 해소할 수 있는 통합적인 가이드라인 제정이 시급하다.
또한, 플랫폼 사업자 역시 투명하고 통일된 정책을 마련해 유족이 디지털 자산을 정당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국민들도 자신의 디지털 유산을 생전에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디지털 유언장이나 자산 목록화에 대한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이 법적 공백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향후 디지털 유산은 상속 분쟁, 해킹, 명예훼손, 신분 도용 등 더 복잡한 사회적 문제로 번질 수 있다. 개인의 죽음 이후에도 ‘디지털 생명’은 계속 남기 때문에,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지위 정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디지털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지털 유산을 위한 사전 준비 체크리스트 10가지 (0) | 2025.06.29 |
---|---|
디지털 유산을 해킹 당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3) | 2025.06.29 |
NFT와 디지털 유산: 블록체인 기반 자산의 상속 가능성 (1) | 2025.06.29 |
디지털 추모관, 온라인 납골당이 되는 시대 (0) | 2025.06.28 |
인간의 기억은 디지털로 남을 수 있는가? (1) | 2025.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