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삶 전반을 지배하게 되면서, 사망 이후에 남겨지는 디지털 흔적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사진, 영상, 이메일, SNS 계정, 클라우드 문서, 암호화폐까지—이제는 오프라인의 유산만큼이나 온라인의 ‘디지털 유산’도 중요한 상속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를 어떻게 다루고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국가와 문화에 따라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은 기술적으로는 세계 상위권이지만, 디지털 유산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법적 준비는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디지털 유산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법적·윤리적 제도도 점차 정비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바라보는 국내와 해외의 인식 차이를 네 가지 측면에서 심층적으로 비교 분석해본다.
법률적 정의와 제도화 수준의 차이
디지털 유산에 대한 가장 큰 인식 차이는 법률적 정의와 제도화에서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디지털 유산’이라는 용어조차 아직 법률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민법, 정보통신망법, 개인정보 보호법 등 관련 법률들이 존재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디지털 자산 상속과 관련된 명시적인 기준이나 프로토콜이 부재한 상황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이미 2015년에 **‘디지털 자산 접근 통일법(RUFADAA)’**이 마련되어, 유족이나 상속자가 디지털 계정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은 50개 주 중 46개 주에서 채택되었고, 법원 판결 없이도 계정 관리자나 상속자가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디지털 유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유럽연합(EU) 또한 디지털 유산의 접근 및 보호를 위한 GDPR 기반의 조항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실제로 유족이 페이스북 계정에 접근할 수 있도록 판결이 난 사례가 있으며, 프랑스는 시민이 생전에 자신의 디지털 자산 관리자를 지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처럼 해외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하나의 ‘공식 상속 자산’으로 취급하고 있고, 관련 법제도도 발전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관련 법안조차 발의 단계에 머무르거나 연구 용역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제도화의 차이는 곧 시민의 준비와 인식 수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생전 준비 인식 차이
디지털 유산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대한 개인의 태도 역시 국가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사망이라는 주제를 꺼리는 경향이 강하고, 생전에 유언장을 작성하거나 자산 목록을 정리하는 문화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디지털 자산은 더더욱 무형적이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준비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반면, 미국과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디지털 유언장(digital will)’이나 ‘디지털 에셋 목록(Digital Asset Inventory)’을 작성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되고 있다. 일부 은행이나 보험사는 고객에게 디지털 자산 목록을 사전 등록하도록 안내하며, 법무법인이나 공증 사무소는 디지털 자산 정리를 위한 별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도 고령화와 디지털화가 함께 진행되면서, ‘디지털 유품 정리 서비스(デジタル遺品整理サービス)’가 민간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중장년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생전 정리’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실제로 많은 일본인이 사망 전 자신이 사용하던 주요 계정의 ID와 비밀번호를 가족에게 안전하게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유산을 ‘남은 이들을 위한 배려’라고 인식하는 문화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법적 준비뿐 아니라 문화적 태도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플랫폼의 대응 방식과 기술 지원의 격차
디지털 유산을 다루는 데 있어 주요 IT 플랫폼의 정책도 국가별로 달리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구글, 페이스북,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디지털 유산을 위한 정책을 일정 수준 이상 갖추고 있지만, 그 접근성과 실행 방식은 문화와 법률 구조에 따라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미국 사용자는 구글 계정에 ‘Inactive Account Manager’를 설정해 사망 또는 장기 미접속 시 특정인에게 계정을 넘기는 기능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페이스북도 ‘Legacy Contact’ 기능을 통해 사망자의 계정을 ‘기념 계정’으로 전환하거나 삭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애플은 iOS 15부터 ‘Digital Legacy Contact’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을 도입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 기능들에 대한 안내나 인식 자체가 매우 낮다. 많은 사용자들이 이러한 기능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영어로 제공되는 설정 메뉴를 번역조차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플랫폼의 기술은 같지만 사용자 층의 인식과 활용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한 한국 내 일부 포털 사이트(예: 네이버, 카카오 등)는 사망자 계정에 대한 접근 요청 절차가 매우 제한적이며, 상속인의 정당성을 입증해도 개인정보 보호 이유로 대부분의 접근을 차단한다. 이는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법적 기준과 사회적 합의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디지털 죽음에 대한 윤리적·문화적 감수성의 차이
마지막으로 중요한 차이는 디지털 죽음을 바라보는 윤리적 감수성과 사회문화적 태도에서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죽음을 여전히 부정적인 주제로 간주하고, 사망자의 데이터를 다루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디지털 유산에 대한 논의도 기술적 측면보다는 감정적 회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유럽과 북미 국가들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윤리적 접근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고인의 SNS 계정 운영 여부, AI로 고인을 복제하는 서비스의 윤리성, 유족의 동의 없는 데이터 활용 문제 등 복잡한 감정과 윤리 문제를 공론장에서 토론한다.
영국에서는 일부 대학에서 ‘디지털 죽음(Digital Death)’에 대한 윤리 강좌를 개설하고 있으며, 유족 상담 전문기관에서는 사망자의 온라인 흔적을 어떻게 정리하고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워크숍을 운영한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디지털 추모관’ 서비스를 통해 가족이 고인을 디지털로 기리는 방식도 정립되어 있다.
또한 AI 기술과 결합된 디지털 유산 문제도 해외에서는 일찍부터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망자의 말투와 패턴을 학습한 AI 챗봇을 가족이 사용하는 서비스는 미국에서 상용화되었으며, 이에 대한 윤리적 반론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이처럼 디지털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감수성의 차이는 한국과 해외 사이에서 매우 뚜렷한 격차를 보여주며, 그 결과 디지털 유산을 어떻게 다루고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결론: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할 ‘디지털 유산의 공공적 시선’
디지털 유산은 단순한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정리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식과 시스템의 총합이다. 한국은 디지털 기술은 앞서가지만, 디지털 유산에 대한 제도, 문화, 윤리적 태도는 여전히 뒤처져 있는 현실이다.
지금이 바로 디지털 유산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적인 문제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해외 사례를 참고해 법제도와 플랫폼 정책을 개선하고, 생전 정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적 기반을 다지는 것이 시급하다.
누구나 죽음 이후에도 온라인 세계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 시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생전에 디지털 유산을 어떻게 남기고, 누구에게 어떻게 넘길지에 대한 명확한 준비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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