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유산

디지털 유산법 제정 움직임과 법적 쟁점: 지금 왜 논의되어야 하는가?

또랑알 2025. 7. 15. 07:19

디지털 유산법 제정 움직임과 법적 쟁점

 

사망한 가족의 블로그를 삭제하지 말아 주세요.”
“아버지가 남기신 사진이 클라우드에 있는데 열 수가 없어요.”
“돌아가신 딸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요청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삶이 온라인에 깊이 연결되면서, 사망 이후에도 남는 ‘디지털 자산’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유산이 집, 통장, 땅이었다면 오늘날의 유산에는 SNS 계정, 클라우드 사진, 이메일, 블로그 콘텐츠, 유튜브 수익, 암호화폐 지갑 등이 포함됩니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유산’이며, 이 유산을 어떻게 처리하고 누구에게 넘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이 문제에 대한 법적 기반이 매우 미비합니다.
사망자의 계정에 접근조차 못하는 유족들, 법원에서 기각되는 디지털 자산 상속 청구, 기업의 약관으로 통제되는 사후 권리…

지금 이 시점에서 왜 **‘디지털 유산법’**이 제정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법적 쟁점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디지털 유산법 제정 시도와 현재 상황

-국회에서의 입법 시도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유산법 제정 논의는 2010년 천안함 희생자 유족들의 요청을 계기로 시작됐습니다.
이후 18대, 19대, 20대 국회를 거치며 여러 차례 발의되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리거나 법적 정의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 2010년: 첫 입법 시도 (디지털 콘텐츠 상속 관련 법안)
  • 2013년: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발의 → 타 법안 우선 논의로 무산
  • 2022~2024년: 디지털 상속 관련 개정안 잇따라 발의 → 여전히 계류 중

-최근 주목받는 배경

 

-이태원 참사(2022) 이후 유족들이 사망자의 스마트폰, SNS, 클라우드 사진 접근을 원했으나 실패

-여론이 디지털 유산 관리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국회와 정부도 다시 논의 시작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보통신망법, 민법, 개인정보 보호법 등 기존 법안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을 뿐,
디지털 유산만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단일법은 부재한 상태입니다.

 

디지털 유산의 정의 문제: ‘자산인가, 개인정보인가’

 

핵심 쟁점: 법적 성격의 불분명

디지털 유산의 법제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법적 정의의 모호성입니다.

 

-자산으로 간주하면: 민법상 상속 대상이 되므로, 유족이 소유 및 처분 가능

-개인정보로 간주하면: 개인정보 보호법상 제3자는 열람·이용 불가

 

실제로 많은 플랫폼(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등)은
사망자의 계정을 ‘개인정보’로 처리하여 유족의 접근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용자의 의사 vs 유족의 권리

-사용자가 생전 비공개를 선택했더라도, 사망 이후 유족이 그 정보를 열람하고 싶어하는 경우 충돌이 발생합니다.

 

-해외의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지털 유언장’이나 ‘계정 관리자 지정’ 제도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절충안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분쟁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플랫폼 약관 vs 법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IT 기업들의 약관 우선

 

현재 한국 내에서는 대부분의 디지털 플랫폼들이
자사의 약관을 기준으로 사망자 계정 및 콘텐츠의 처리 방식을 결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유족이 회사에 요청하더라도 거절당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예시)

-페이스북: 기념 계정 설정 없으면 삭제 또는 접근 불가

-애플: 유산 관리자 지정이 없으면 iCloud 접근 불가

-네이버: 별도 법적 증거 없으면 이메일 열람 불가

 

이처럼 이용자가 생전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유족은 아무 권한도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플랫폼 책임과 이용자 권한의 균형

 

-기업은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우려로 사망자의 데이터 제공을 꺼리는 반면,

-유족은 해당 계정이 경제적·정서적 가치가 있으므로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법적 기준 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해외 사례와 한국이 참고해야 할 점

 

- 미국: RUFADAA 법 제정

미국은 2015년부터 디지털 자산 접근에 대한 통합 법률인
RUFADAA (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를 제정했습니다.

  • 사용자가 생전 명시한 유언장 및 관리자 지정이 최우선
  • 유산 관리자는 법적 절차를 통해 이메일, 계정, 콘텐츠 열람 가능
  • 사망자의 사생활 보호와 유족 권한 사이 균형 유지

-유럽: GDPR과 상충하지 않도록 구성

  • 유럽에서는 개인정보 보호가 매우 강력한 반면,
  • 일부 국가(예: 독일)는 디지털 자산을 상속 대상으로 명시하고 유족의 권리 보호

- 한국의 과제

  • 명확한 정의부터 시작해야 함 (디지털 자산 vs 개인정보 구분)
  • 사용자 생전 의사를 기록할 수 있는 디지털 유언장 제도 도입
  • 사망 이후 가족이 최소한의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절차적 장치 마련
  • 기업 약관과 충돌 시 우선순위에 대한 법적 기준 정립

 

결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법제화

 

디지털 유산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생명 이후의 권리, 가족 간의 애도, 정보에 대한 주권과 연결된 중대한 이슈입니다.

현실은 이미 온라인으로 옮겨졌고, 우리 대부분은
수많은 디지털 자산을 남기며 삶을 마무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은 가족과 사회가 그 자산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명확한 법적 기준과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디지털 유산법을 미룰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생전에 나의 권리를 명확히 하고
사후에는 유족에게 따뜻한 디지털 유산을 물려줄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