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디지털 유산 처리 현황과 법률
디지털 기술이 사회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유산이라 하면 부동산, 예금, 귀중품과 같은 물리적인 자산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이메일, 사진, 동영상, 클라우드 저장소, SNS 계정 등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디지털 자산’ 또한 상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며, 동시에 디지털 기술 도입도 활발한 나라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디지털 유산에 대한 문제를 더욱 현실적인 과제로 만든다. 실제로 고인이 된 가족의 온라인 계정, 클라우드 저장소, 암호화폐 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놓고 혼란을 겪는 사례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화에 비해, 일본의 법률 체계와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물리적 유산 중심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일본에서 디지털 유산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으며, 실제 상속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그리고 법적·제도적으로 어떤 대응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네 개의 관점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디지털 유산을 제대로 이해하고 준비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기억과 자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행위다.
일본에서 디지털 유산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가?
일본 법률에서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이라는 개념은 아직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일본 민법(民法)은 전통적인 상속 재산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을 두고 있으나, 온라인 자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아직까지 부족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회에서는 점점 더 많은 디지털 정보가 상속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일본 내 법률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디지털 유산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경제적 가치가 있는 디지털 자산: 예를 들어 암호화폐, 인터넷 뱅킹 정보, 온라인 결제 포인트, 유료 구독 서비스 계정 등이 해당된다. 이들은 실제 금전적 가치를 가지며, 민법상 상속 대상이 될 수 있다.
-개인적 정보로서의 디지털 자산: 고인의 이메일, 사진, 영상, 블로그, SNS 게시물 등은 직접적인 경제적 가치는 없지만, 유족에게 감정적·역사적 가치를 제공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산들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접근 방법이나 소유권 주장에 있어 큰 제약이 따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유족들이 고인의 스마트폰 잠금 해제조차 하지 못해 데이터를 확인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디지털 자산도 민법 제896조에 의거한 ‘재산’의 범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 판례와 명문화된 규정은 부족하다.
실제 상속 사례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유산 관련 문제들
일본에서는 디지털 유산이 상속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는 고인의 계정에 접근하지 못해, 가족이 중요한 문서나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대로 폐기되는 경우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첫째, 접근권 문제이다. 대부분의 디지털 자산은 로그인 정보와 인증 절차가 없으면 접근이 불가능하다. 구글 드라이브, 애플 iCloud, SNS 계정 등은 모두 해당 사용자 본인의 인증이 없으면 콘텐츠 확인이 불가능하다. 심지어 가족이 법적으로 상속권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서비스 제공업체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접근을 차단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둘째, 법적 소유권 불명확성이다. 예를 들어 블로그나 유튜브 채널과 같은 콘텐츠 기반 플랫폼은 계정 소유권과 콘텐츠의 저작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고인이 남긴 콘텐츠를 유족이 수정하거나 운영하려는 경우, 명확한 법적 권한이 요구되나, 이를 해석할 법적 근거가 충분치 않다.
셋째, 가족 간 분쟁의 가능성이다. 고인의 디지털 자산이 금전적 가치나 사회적 명성을 동반하는 경우, 상속인 간에 소유권을 두고 다툼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암호화폐 지갑의 접근 정보를 둘러싼 갈등은 최근 일본 내에서 민사 소송으로 번지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내에서 디지털 유산은 실제로 다양한 문제를 유발하고 있으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아직 미비하다. 이로 인해 많은 유족들이 사설 업체나 IT 전문가의 도움을 받거나, 경우에 따라 디지털 자산을 포기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의 대응 현황: 제도와 현실의 간극
일본 정부는 디지털 유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부 대응을 시도하고 있으나, 제도적 틀은 여전히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현재 일본 법무성과 총무성은 디지털 유산에 대한 연구와 정책 제안을 진행 중이며,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고령층을 대상으로 디지털 유언장 작성이나 암호 관리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적 시도는 대부분 홍보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강제성이 없는 권고사항에 그치고 있다. 실제 법률 개정이나 가이드라인 제정은 아직도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개인이 직접 디지털 유산을 준비하지 않는 한, 사망 후에는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기업의 대응도 상황은 유사하다. 일본 내 주요 IT 플랫폼 기업들은 대부분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유족에게 계정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글로벌 플랫폼, 예를 들어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비활성 계정 관리자 또는 추모 계정 기능을 통해 사용자의 사후 디지털 자산 관리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은 사용자가 생전에 직접 설정해야만 발동되며, 사망 이후에는 새로운 설정이나 위임이 불가능하다.
일본 기업 중 일부는 유족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사례도 있지만, 통일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아 사용자마다 경험이 다를 수 있다. 특히 일본의 금융권은 디지털 자산 상속에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암호화폐 거래소나 온라인 결제 포인트의 상속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유산을 대비하기 위한 개인의 전략과 사회적 과제
현재 일본에서는 디지털 유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 사전에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생전의 책임이자 가족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다음은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디지털 유산 대비 전략이다.
첫째, 디지털 자산 목록 작성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온라인 서비스, 계정, 보관 파일, 암호화폐, 포인트 등을 목록화하고 이를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 가능한 경우 이 목록은 유언장에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비밀번호 및 2단계 인증 정보의 위임이다. 비밀번호 관리자 프로그램(예: 1Password, Bitwarden)을 활용하여 계정 정보를 안전하게 저장하고, 접근 권한을 신뢰할 수 있는 가족 또는 변호사에게 위임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유언장의 작성과 공증이다. 법적 효력을 갖는 유언장에 디지털 자산 항목을 포함시키고, 해당 자산의 소유권 및 이용 목적, 관리 방법을 명시함으로써 유족의 혼란을 줄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사회 전체가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정비와 사회적 인식 전환에 나서야 한다.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디지털 자산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세대 간의 연결고리가 되는 요소다. 정부, 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고인의 디지털 기록은 영구히 소멸될 수밖에 없다.
결론: 일본형 디지털 상속 시스템의 정립이 시급하다
일본 사회는 이미 디지털 시대에 진입했으며, 유산의 개념 또한 물리적 자산을 넘어서는 범위로 확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법률과 제도는 여전히 디지털 유산을 상속의 범주로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유족들이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지 법의 개정이 아니라, 디지털 자산을 삶의 일부이자 죽음 이후에도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문화적 전환이다. 개인은 생전부터 자신의 디지털 자산을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하며, 정부와 사회는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디지털 유산은 고인의 삶을 이어주는 기록이며, 남겨진 가족에게는 정서적·법적 가치가 동시에 존재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일본은 지금, 새로운 상속의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