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유산을 위한 정책 제언: 한국형 입법안의 방향
현대인의 삶은 디지털 공간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메일, 클라우드, SNS, 블로그, 암호화폐, 유튜브 채널 등 다양한 디지털 자산을 축적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데이터의 집합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 경제적 자산을 반영하는 유산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행 법체계는 이러한 디지털 유산에 대한 정의나 처리 절차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으며, 법적·제도적 공백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고인의 계정에 접근할 수 없고, 자산의 회수 또한 어려워지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국내 플랫폼과 글로벌 기업 간의 규제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정책적 대응의 필요성을 바탕으로, 한국형 입법안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구체적으로 제언하고자 한다.
디지털 유산 입법의 필요성: 법적 공백과 사회적 수요
대한민국 민법은 전통적인 상속법 규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상속의 대상은 주로 물리적 재산 또는 금융자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자산이 실질적 가치와 개인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행 법제는 이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로 인해 유족들은 고인의 이메일, 사진, 클라우드 저장소, 소셜미디어 계정, 암호화폐 지갑 등에 접근할 수 없고, 계정이 삭제되거나 자산이 소멸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개인정보 보호법은 사망자의 정보 보호를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 유족의 정당한 상속권과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상속권 보호와 정보주체 보호라는 두 법 원칙이 충돌하는 지점이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입법이 절실하다. 또한,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이 각자 상이한 약관을 통해 고인의 계정 접근을 제한하거나 사후 관리 권한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어, 국내 이용자들의 권익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현실 또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디지털 유산을 명확히 정의하고, 이를 민법 또는 별도의 특별법에서 상속 자산으로 규정하며, 유족의 접근 절차와 조건을 구체화하는 입법이 요구된다. 이는 향후 디지털 시대를 대비하는 사회적 인프라의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한국형 입법을 위한 기본 원칙과 방향 설정
디지털 유산과 관련된 입법은 단순히 계정 접근권을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의 법적 지위와 사용자의 생전 의사, 유족의 권리 간 균형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이 마련되어야 한다.
첫째, 디지털 자산의 유형 분류 및 법적 정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경제적 가치가 있는 디지털 자산(암호화폐, 유튜브 수익 등)과 정서적 가치가 중심인 자산(사진, 메일, 영상 등)을 구분하여 법적 처리 방식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
둘째, 사용자의 생전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중요하다. 구글이나 애플처럼 사전에 계정 상속 대상자나 삭제 여부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을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이를 유언장과 연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사전 계획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프라이버시 보호의 연장선이다.
셋째, 유족의 정당한 접근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계정 정보를 넘기는 차원이 아니라, 상속인 확인 절차, 법적 증명 요건, 민감 정보 보호장치 등을 포함한 복합적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넷째, 플랫폼 기업의 책임 명확화와 규제 일관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국내외 디지털 플랫폼은 각기 다른 사후 계정 정책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사용자 보호보다 기업의 자산 보호에 더 집중되어 있다. 법률은 일정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기업의 자의적 운영을 제한하고, 사용자 중심의 접근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해외 입법 사례와 한국에의 적용 가능성
디지털 유산 관련 입법은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미국은 2015년 통일법위원회(NCCUSL)가 제정한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 (FADAA)」**를 통해, 상속인이 고인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다. 이 법은 생전 사전 동의와 유언장 유무에 따라 접근 범위를 달리 설정하고 있으며, 프라이버시 보호와 상속 권리 사이의 균형을 추구한다.
프랑스의 경우, 디지털 유산에 대한 고인의 의사를 사전에 명시하지 않은 경우, 유족이 일정 조건 하에 계정 접근 및 데이터 보존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독일은 2018년 연방대법원 판결을 통해, 페이스북 계정이 상속 대상이라는 점을 명시한 바 있으며, 이는 디지털 계정도 전통적 자산과 동일한 방식으로 승계될 수 있음을 인정한 판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해외 사례는 한국형 입법에 직접적인 시사점을 제공한다. 즉, 디지털 유산 입법은 단일한 법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민법 개정, 개인정보보호법 정비, 플랫폼 규제법 마련 등 다층적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생전 동의 제도, 유언장 연계 시스템, 국가 차원의 표준 양식 등도 함께 도입되어야 한다.
정책 제언: 단계별 한국형 디지털 유산 입법 로드맵
대한민국이 디지털 유산에 대해 실질적인 입법을 추진하려면, 다음과 같은 단계별 정책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
1단계: 개념 정립 및 법적 정의 도입
민법상 상속의 범위에 ‘디지털 자산’을 명시적으로 포함시키고, 유형에 따라 구체적인 분류를 도입해야 한다. 디지털 콘텐츠, 계정, 데이터 저장소, 암호화폐 등으로 범주를 나눠 각각의 법적 성격을 정의해야 한다.
2단계: 생전 의사표시 제도화 및 유언장 연계
사용자가 생전에 디지털 자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명확히 결정할 수 있는 기능을 법제화하고, 이를 공증된 유언장과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공기관이나 법무사 협회 등을 통한 표준 양식 개발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3단계: 상속 절차와 유족 접근권 제도화
유족이 정당하게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사망자 증명, 가족관계서류, 유언장 사본 등을 바탕으로 플랫폼에 요청할 수 있는 제도적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 플랫폼은 이에 응해야 하며, 미이행 시 법적 책임이 부과되어야 한다.
4단계: 기업 규제 및 국제 협약 논의 병행
글로벌 플랫폼과의 연계 및 규제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 협약 참여 및 다자 협의체 구성이 필요하다. 동시에 국내 플랫폼에 대해서는 사후 계정 처리정책, 데이터 보존의무, 투명한 정보 제공 의무 등을 법률로 강제해야 한다.
결론 : 디지털 유산은 더 이상 기술적 부속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우르는 새로운 법적 개념
한국 사회가 이 새로운 유산의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려면, 디지털 자산의 정의에서부터 상속 구조, 유언장 제도, 플랫폼 책임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이고 실효성 있는 법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형 디지털 유산 입법은 단지 사후 처리를 위한 규정이 아닌, 생전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사망 이후에도 고인의 권리와 가족의 연결을 지켜내는 사회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이 바로 정책 전환의 골든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