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유산

사망자의 디지털 흔적, 삭제해야 할까 보존해야 할까?

또랑알 2025. 7. 6. 17:58

-디지털 유산에 대한 사회적 딜레마-

 

현대 사회는 온라인 공간과 현실 세계의 경계를 점점 허물고 있다. 사람들은 일상의 대부분을 디지털 공간에서 기록하고 저장한다. 사진, 영상, 블로그 글, 이메일, 소셜미디어 게시물, 온라인 구매 이력, 채팅 내용까지 모든 디지털 활동은 그 사람의 흔적으로 남는다. 이러한 디지털 흔적은 그 사람이 사망한 이후에도 인터넷 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디지털 유산이란 단순히 인터넷 상에 남은 기록이 아니라, 고인의 정체성, 인간관계, 추억, 정보 등이 담긴 삶의 일부다. 그러나 이 유산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사회적 기준은 아직 부족하다. 일부는 고인의 사생활 보호와 개인정보 보안을 이유로 삭제를 주장하고, 또 다른 일부는 기억과 추모, 역사 보존의 측면에서 보존을 원한다. 이러한 관점 차이는 유족과 사회 모두에게 실질적인 딜레마를 안겨준다. 본 글에서는 디지털 유산으로 남은 사망자의 흔적을 둘러싼 삭제와 보존의 쟁점을 중심으로 사회적, 윤리적, 법적, 감정적 관점을 다각도로 분석하고자 한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사회적 딜레마

 

 디지털 유산의 범위와 그 상징적 의미

디지털 유산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고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료이자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하는 상징적 기록이다. 그 범위는 매우 넓다. 이메일, 클라우드 파일, 소셜미디어 계정, 사진 및 동영상, 블로그 게시물, 검색 이력, 심지어는 암호화폐와 같은 디지털 자산까지 모두 포함된다.

특히 SNS는 그 사람의 감정 표현, 인간관계, 일상의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어 고인의 삶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플랫폼이 되었다. 유족들은 이러한 기록을 보며 고인을 추억하고, 때로는 고인의 사망을 실감하고 애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디지털 유산은 고인의 정체성과 기억을 담는 '디지털 무덤' 또는 '디지털 기념비'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유산은 물리적 유산과 달리 쉽게 복제되거나 유통될 수 있으며, 고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적 문제가 제기된다. 유산이 갖는 감정적 가치와 동시에 정보 보안, 사생활 침해, 데이터 과잉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디지털 유산을 삭제해야 할지, 아니면 보존해야 할지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삭제를 주장하는 입장: 개인정보 보호와 현실적 필요

 

디지털 유산을 삭제해야 한다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출발한다. 첫째는 고인의 개인정보 보호다. 생전 고인이 남긴 디지털 흔적에는 민감한 개인정보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며, 유족이나 제3자에게 노출될 경우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메일 내역, 메신저 대화, 비공개 사진 등의 유출은 사망자뿐 아니라 유족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다.

둘째는 현실적인 디지털 환경 관리의 필요성이다. 사망자의 계정이 방치되면 해킹이나 도용, 악성 광고 게시 등 보안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오래된 소셜미디어 계정이 도용되어 스팸 또는 가짜 뉴스의 유포 창구로 사용되는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이로 인해 유족이 의도치 않게 피해를 입는 경우도 발생한다.

또한 디지털 공간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무수히 쌓여가는 사망자의 계정과 데이터는 플랫폼의 관리 비용을 증가시키고, 나아가 전체 온라인 생태계의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들은 ‘잊혀질 권리’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사망자에게도 존중되어야 하며, 고인이 원하지 않은 형태로 정보가 남는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보존을 주장하는 입장: 기억, 추모, 역사로서의 가치

 

반면 디지털 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은 그 흔적이 갖는 기억의 가치를 강조한다. 특히 사망자의 SNS, 블로그, 유튜브 등의 콘텐츠는 유족에게는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중요한 정서적 자산이다. 어떤 유족은 고인의 인스타그램에 주기적으로 댓글을 남기며,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그리움을 표현한다.

이러한 활동은 유족의 애도 과정에서 중요한 심리적 기능을 한다. 전문가들은 정서적 회복을 위한 애도 단계에서 디지털 공간이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단절된 죽음보다 연결된 기억은 슬픔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더불어 디지털 유산은 사회적·역사적 가치도 지닌다. 유명 인물이나 사회적 사건의 희생자의 디지털 흔적은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하는 자료로도 활용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SNS 기록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자료로써 많은 연구와 보존의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디지털 기록이 하나의 사회적 아카이브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한 고인의 사전 동의나 의사 표명이 없었다면, 삭제보다는 유족이나 사회가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이를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은 점점 더 많은 플랫폼들이 ‘추모 계정’ 기능을 도입하는 배경이 되었다.

 

삭제와 보존 사이, 무엇이 필요한가: 제도와 기준의 부재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을 둘러싼 삭제와 보존의 논쟁은 결국 명확한 기준과 절차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을 갖고 있지 않으며, 플랫폼들도 자사 정책에 따라 개별적으로 계정 관리 방침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유족이 요청할 경우 추모 계정으로 전환하거나 삭제할 수 있지만, 고인이 생전에 설정하지 않은 경우 계정의 미래는 유족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이런 상황은 유족에게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뜻과 무관한 결정이 내려지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사망자의 디지털 흔적을 둘러싼 처리 문제는 개인의 의사를 사전에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디지털 유언장이나 사전 계정 관리 제도의 도입이 검토되어야 한다. 개인이 생전에 자신의 디지털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명확히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법과 유산 상속법 내에 디지털 유산 관련 조항을 신설함으로써 법적 혼란을 줄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사회적으로는 디지털 유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삭제와 보존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망자의 인격권과 유족의 애도권, 사회의 정보 보존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사회적 의무에 가깝다. 이를 위해 교육, 공공기관 캠페인, 플랫폼의 책임 강화 등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결론 : 디지털 시대의 죽음은 새로운 유형의 삶의 연장

 

사망자의 디지털 흔적은 단순한 온라인 데이터가 아니라, 고인의 삶, 관계, 기억, 정보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디지털 유산이다. 이러한 유산을 삭제할지 보존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감정적, 윤리적, 법적, 기술적 요소가 모두 작용하는 복합적인 문제다. 보안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삭제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정서적 위로와 기억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보존이 더 바람직한 상황도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삭제냐, 보존이냐’의 이분법적인 선택이 아니라, 고인의 의사를 반영하고 유족과 사회가 함께 수용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과 절차의 마련이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인식과 제도가 확립되어야만, 우리는 사망자의 삶을 더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죽음은 새로운 유형의 삶의 연장이며, 그 흔적에 대한 고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